Daily Effect 하루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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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쿠스틱 기타를 제작하는 장인 하야세 린早瀬 輪이 기타를 제작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한 대의 기타를 만드는 과정이 얼마나 복잡한지에 놀랐고, 그 지난한 과정을 세심하고 진중하게 진행하는 모습을 보며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하야세 린이 만드는 놀라운 악기들만큼이나 그의 말에 큰 울림이 있어 이를 옮겨봅니다. 이 말에는 그의 직업관과 아름다움에 대한 관념이 담겨 있습니다.
"저는 우선 신중하고 정확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저는 최종적으로 많은 요소가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악기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 요소에는 음색은 물론, 연주의 용이함, 내구성도 포함됩니다.
저는 추악한 것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추악한 것을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라고 말해야 할까요? 그 이면에는 고의성이나 일종의 의도가 있습니다. 좋은 것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일에 다른 무언가가 숨어 들어가려고 합니다. 추악한 일은 그러한 불순한 의도가 개입될 때 탄생합니다.
저는 가능한 한 불순물이 없는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것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감각적인 '미'의 감성뿐만 아니라 성능(음색), 편의성(연주의 용이함) 그리고 내구성까지 아우르는 종합적인 개념입니다. 저는 건축을 업으로 삼고 있기에 그의 말에서 기타 대신 건축을 대입해 봅니다. 그래도 충분히 뜻이 통합니다.
그는 어떤 고의성이나 의도가 불순물이며, 이것이 없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합니다. 매우 잘 설계된 건물을 볼 때면, 그 자리에 원래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가감이 필요치 않은 상태가 바로 불순한 의도가 소거된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디자이너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드러내기보다는 자제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제할 대상을 스스로 깨닫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건축의 장인은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축의 기본 요소가 견고함(firmitas), 유용성(utilitas), 아름다움(venustas)에 있다는 것, 디자이너는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모두 학교에서 배운 기본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것일수록 더 쉽게 잊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다시금 배웁니다.
하야세 린 인터뷰 및 사진 :
https://www.youtube.com/watch?v=pEpACOTrUMo
https://brunch.co.kr/@demji/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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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 23:59
밝은 마음으로 충만한 순간입니다.
2025년, 그 빛이 항상 함께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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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조각의 근본적인 차이는 그 재료가 만들어내는 공간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조각은 전시대 위에서, 건축은 사용자가 건물에 거주하기 시작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됩니다. 공간 속을 거닐고, 그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비듬이 누워 휴식을 취하는 등의 인간의 활동 모두가 건축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그리고 화룡점정의 요소가 있습니다. 빛입니다. 빛은 공간의 마침표입니다. 빛이 사람들의 움직임을 조용히 밝혀줌으로써 건물은 공간은 생명을 얻습니다.
지난여름 준공된 미래교실 공간이 수업시간에 활용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학생들이 자유롭게 공간에 머물며 즐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오후의 햇빛은 반투명한 재료의 물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설계자로서의 제가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느낌이 듭니다.
https://brunch.co.kr/@demji/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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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을 설계할 때 여러 가지 조건들이 주어집니다. 건물이 지어질 공간과 시간에 설정된 법, 기술 등의 제약 조건이 있고 건축주로부터 공간의 기능, 크기와 사업예산 기준을 전달받습니다. 이렇게 주어진 조건과 그것을 반영한 결과는 일대 일 대응합니다. 이것은 마치 채점지의 배점 항목을 하나하나 만족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 반문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건축설계공모 지침으로서 배점표가 주어지는 경우가 있고, 건축가들은 수련의 과정에서 이 같은 훈련을 오랜 기간 받아왔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평가의 매트릭스를 바탕으로 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된 관심은 주어진 것의 반영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말 밤 명동성당에 들렀다가 성당의 서측 외벽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학생들을 보고 궁금한 것이 생겼습니다. 무엇이 학생들로 하여금 다소 밋밋해 보이는 건물 외벽을 기념촬영의 배경으로 삼도록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종탑 또는 장미창 아래나 아치같이 특징적인 부분을 두고 말입니다. 외벽을 기념의 배경으로 삼는 저 광경은 건물이 지어질 당시 주어진 조건이 아닐뿐더러 예상했던 것도 아닐 것입니다.
휴대폰 카메라를 높이 들고 있는 학생은 벽돌벽 앞의 두 학생을 스테인드글라스 하단과 함께 사진에 담으려고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와 같이 사진을 찍는 세 명의 학생이 있고 나머지 둘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는 그 광경이 예뻐 보여서 셔터를 눌렀습니다. 찍고 나서 보니 제 사진 역시 건물이 배경입니다.
주어진 조건이 아님에도 공들여 만든 것. 그것으로 예측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 그 결과로 건축에 풍부함을 더하는 요소를 저는 건축의 잉여剩餘라고 생각합니다. 건축의 다의성은 이렇게 부여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https://brunch.co.kr/@demji/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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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을 옮긴 지 두 달이 되어갑니다. 우연한 기회로 오게 된 곳인데 지척의 거리에 명동성당이 있었습니다. 아침 출근길에 들러 건물을 마주해 봅니다.
완공된 지 120여 년, 하지만 저는 더 오랜 시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딕성당의 외형을 결정짓는 첨탑과 궁륭, 이것은 유럽에서 수천 년 동안 짓기와 허물기를 반복하며 만들어낸 시행착오의 결과물입니다. 그렇기에 이 건축은 평가,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듯합니다. 지어지는 순간 절대적 참이 되는 것입니다. 수백만 년 동안 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해 온 문자의 정통성 같은 것입니다.
성당을 등지고 바라보면 새롭게 지어진 빌딩들이 보입니다. 제각각 디자인을 뽐내며 서 있지만 평가와 비평의 대상이 되기에 무엇인가 부족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완벽함은 건축가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만들어 내는 것 같습니다. 축적의 시간보다 깊고 무거운 것은 없습니다.
https://brunch.co.kr/@demji/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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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입니다. 여느 때처럼 출근하는 주말입니다. 머리도 식힐 겸 사무실 주변을 걷다 보니 오후의 햇살이 꽤 따갑습니다. 그림자의 윤곽도 뚜렷합니다. 미국 출장 마지막날 답사했던 솔크 연구소에서의 오후가 기억났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기억은 선명합니다.
솔크 연구소 Salk Institute for Biological Studies. 루이스 칸이 1955년 bath house로 자신의 정체성을 처음으로 드러낸 이후 10년 만인 1965년 완성하고 처음으로 만족해했던 그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루이스 칸의 전기적 다큐멘터리 나의 건축가 My Architect에서 그의 아들 나다니엘 칸은 이 건물에 대한 감회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뭔가 영적인 것이 있다"
"There is something spiritual about this space"
건축에서 느껴지는 무형의 존재감을 나다니엘 칸은 '뭔가 영적인 것something spiritual'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르 코르뷔지에가 라 토로네 수도원Abbey of Le Thoronet에서 감명을 받고 쓴 문장, "빛과 그림자는 이 진실의 건축의 확성기입니다the light and the shadow are the loudspeakers of this architecture of truth"에서의 '진실 truth'에 해당할 것입니다.
이런 건축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적인 것', 또는 '진실'은 이 세상 것이 아니기에 특정 시기, 선택된 고귀한 존재들에 의해 이 땅에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여느 때와 같은 덧없는 오후입니다.
Salk Institute for Biological Studies / Louis I. Kahn
https://brunch.co.kr/@demji/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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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아니기에 인간의 판단은 참의 언저리에 머무릅니다. 제도적으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이들의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도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 수 없으며 오점 없는 판단을 내리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결과들이 모여 사회가 돌아갑니다. 따라서 보이는 것은 참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은 제도적 과정과 결과일 뿐입니다. 제도는 어딘가 엉성하고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항상 변화하고 일시적입니다.
오늘 오랫동안 진행되던 개인적인 일 하나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잘 되고 못되고를 판단할 일은 아니기에, 그리고 오랫동안 끌어왔던 일이기 때문에 다행스럽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제도라고 부르는 과정이 겉보기와는 달리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아 조금 놀랐습니다. 웅장해 보이나 가짜 대리석을 바른, 관행과 관습으로 축조된 건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그 부실한 구조물 안에서도 소중한 것은 남았습니다. 그것은 '참'입니다.
한때, 특정 건축에서 보이는 아우라가 어떻게 발현되는 것인지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만 알면 초월적 가치를 지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공간도 빛도 디테일도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들은 무형의 가치가 제도를 통해 몸체를 지닌 객체로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기에 찾을 수 없습니다.
안도 타다오의 초기 걸작, 라이카 본사는 2012년 철거되어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건물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무엇인가가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사진 속 보이는 모습보다 중요한 어떤 것 같습니다. 이것을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름이 어찌 되었든 그것은 살아남아 언젠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오늘을 남기고자 씁니다.
https://brunch.co.kr/@demji/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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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회관 SF세계명작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총 60권으로 간행된 어린이를 위한 SF소설 시리즈로 1975년 이후 순차적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서점에 갈 때마다 한 권씩 사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납니다.
이 책의 원전은 이와사키서점岩崎書店에서 1966년 간행한 에스에프 세계명작 エスエフ世界の名作입니다. 서구권 작가들의 글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표지와 삽도를 추가했습니다. 아동용 도서임에도 그림의 수준이 상당했는데, 당시 출판사에서는 여기에 큰 비중을 두어 인기 있는 일러스트 작가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그중 하나가 나중에 일본 팝아트의 거장이 되는 요코오 타다노리 橫尾忠則입니다.
1956년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 요코오 타다노리는 1965년 29살 되던 해,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깨닫고 지금까지의 자신은 오늘부로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과거의 '나', 즉, 지금까지 익혀온 지식으로 이루어진 사회적인 '나'를 살해하는 일종의 자살로서, 이후 그의 작품은 모더니즘에서 벗어나 키치적인 일본 냄새를 적나라하게 풍기는 방향으로 돌아섭니다.
도발적 성향의 일러스트레이터, 그의 그림을 아동용 도서에 실은 출판사, 그 책을 읽고 성인이 된 이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는 1980년대 중반의 일본. 어떤 시대의 문화적 특징이 하나의 요인으로만 형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문화는 또 다른 여러 문화가 중층결정된 결과입니다. 이 케이스도 그 여럿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오늘 2007년 요코오 타다노리 전시회에서 보았던 포스터가 생각이 났습니다. 기록을 위해 몇 글자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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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산. 매주 말 찾던 산이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3년 간 발길을 멈췄다가 오늘에야 올랐습니다. 오를 때 보지 못한 멋진 풍경들을 내려올 때는 이곳저곳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정상을 향할 때는 목표에만 정신이 팔려 그랬던 모양입니다.
생각해 보니 오르고 내려오는 것 모두 하나로 연결된 과정에 불과하군요.
앞으로 산에 오늘 때는 하산하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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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공간을 위해서는 무엇인가로 채워야 합니다. 투명하고 단단한 무엇, 일종의 역설입니다.
이 앨범은 사카모토 류이치, 그가 편곡과 프로듀서로 참여한 숨어있는 명반 중 하나로 1994년에 녹음되었음에도 퇴색됨이 없이 여전히 신선합니다.
음악은 빈 공간, 그리고 시간을 채우기에 적격입니다. 다만, 모든 음악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고맙습니다. 이마이 미키, 그리고 사카모토 류이치. 坂本 龍一さん, 今井美樹さん,,,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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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비평가 아즈마 히로키東 浩紀에 따르면 근대 이전의 문화의 형태는 원본에서 가지가 뻗어 하위의 것이 창조되는 트리구조였던 반면, 1989년 냉전 붕괴 이후에는 다양 다종의 정보가 담긴 데이터베이스에서 추출되어 결합된 이종異種의 것이 하나의 창조물이 되고 이것이 다시 데이터가 되는, 원본과 사본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웹 형태의 탈중심 문화로 이행된다고 하였습니다. 포스트모던 문화의 생성구조를 밝힌 이 글이 발표된 것은 2001년입니다. 20여 년이 지난 현재, 그의 예측은 이미 자연스러운 현실이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관심을 끌고 있는 인공지능의 창조방식이 포스트모던 문화의 생성구조와 매우 닮아있다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은 웹에서 데이터를 추출하여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 웹에 유포된 이러한 결과물들이 또 하나의 소스가 되는 되먹임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의 반복은 결과물의 품질저하로 이어지며, 따라서 이것을 창조라고 부르기에 주저하게 됩니다. 인공지능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다기보다는 인간이 하던 일을 빨리(하지만 엄청나게 빠르게)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혹자는 인공지능이 전례 없는 컬처 쉬프트를 발생시킬 것이라고 우려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명 진보에 정해진 과정이 있다면 인공지능은 그 속도를 가속시키는 속도조절 버튼 정도가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스피드만으로도 우리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영화는 이미 결말이 정해져 있고 화면은 빨리 감기로 보는 듯 스쳐 지나갑니다. 그 끝이 해피엔딩이기를 바랍니다.
Church Architecture Image Created by DALL-E in 3 Words 20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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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 없는 소녀The Quiet Girl(2021)를 상영 중인 시네큐브를 10여 년 만에 방문했습니다. 당시에 가장 좋아하는 극장이었는데 흥행여부와 상관없이 옥으로 만든 소품과 같이 담백한 아름다움을 지닌 영화들을 소개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극장의 내부 공간도 괜찮습니다. 지금은 낡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멀티플렉스에서 느낄 수 없는 고급스러움이 있습니다. 비상업적인 고결함을 풍긴다고나 할까요.
영화로 돌아가면, '말 없는 소녀'는 두 번째로 접하는 아일랜드 영화입니다. 아일랜드를 생각하면 몇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존 F 케네디 선조들의 고향 - 1800년대 중반, 가난한 농부였던 그들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작물인 감자에 병이 돌면서 재난과 같은 흉년이 계속되자 신대륙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리고 영화 원스(2007) - 가난한 음악가의 이야기. 마지막으로 제임스 조이스. 이 셋의 공통점은 가난입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80년대까지 아일랜드는 유럽의 최빈국 중 하나였습니다.
가난한 어느 시골집의 막내딸 카이트. 아버지는 알코올과 도박에 빠져있고 네 번째 아이를 임신한 어머니는 생활고에 지쳐있습니다. 언니들을 포함한 가족들 모두 내성적인 성격의 카이트를 탐탁해하지 않는데 어머니의 출산이 임박하자 카이트는 버려지듯 먼 친척 부부에게 맡겨집니다. 이제 카이트는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 여기까지. 이후의 줄거리는 설명이 없어도 충분히 예상 가능할 듯합니다. 영화는 불우한 소녀의 성장기로서 스테레오 타입의 뻔한 플롯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외외였습니다. 95분의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이야기 전개나 무용 같은 액션, 또는 탄성한계에 도달한 갈등구조가 없음에도 촘촘한 복선으로 영화의 몰입도는 상당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물들의 감정묘사가 좋았습니다. 등장인물 중의 어느 누구도 자신의 감정을 "미안해", "사랑해'과 같은 직접인 말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테이블에 올려놓은 과자 한 개, 창을 향해 돌어선 남자의 뒷모습이 이것을 대신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설명하는 라스트 신.
건축가 켄고 쿠마는 일상적인 것을 특별하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일상을 빛나는 것으로 승화시키는 무엇인가가 담겨 있다. 이 영화도 그렇습니다. 잘 감지되지 않는 일상의 따스함을 일깨워줍니다. 빡빡한 일상에 치여 동결건조된 마음을 되돌리고 싶은 분들께 추천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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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토라. 이 책에서는 2차 대전 패망국이자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 일본이 미국의 패션문화를 어떻게 수입하고 현재에 이르러 어떻게 패션 강국이 되었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점령군 미군을 통해 미국의 문화적 풍요로움을 체험하고 이것을 복제하려는 연구가 지식이 되어 사람들에게 퍼져나가고, 이런 밑바탕 위에 '일본성'을 추가하여 원본보다 원본 같은 또 다른 진본을 만들어 미국에 역수출하고 있다는 사실. 이것이 아메토라アメトラ로 아메리칸 트래디셔널의 일본식 명칭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에피소드는 60-70년대 일본 패션시장을 주름잡은 의류업체 'VAN재킷' 이야기입니다. 창업자 이시즈 겐스케石津謙介는 1950년대 미국 아이비리그 학생들이 입던 옷차림을 동경하여 이것을 '아이비'로 명명하고 스타일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단추 하나까지 뜯어보며 연구합니다. 이렇게 이시즈 겐스케는 아이비스타일을 하나의 형식으로 정리하여 옷을 만들어 판매합니다. 이와 동시에 군복과 몸빼가 전부였던 당시 일본인들에게 서구의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당시 그가 추구했던 것이 '의복'을 만들어 파는 것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을 판매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시즈 겐스케의 VAN재킷은 1978년 도산하지만 이곳 출신이 새로운 의류회사를 창업, 지금의 '유니클로'로 성장시켜 표준화된 '아이비' 스타일의 옷을 미국에 역수출합니다. 유니클로는 옷을 포함한 토털 아이템을 취급함으로써 이시즈 겐스케의 소망을 이룹니다.
일본은 이렇게 아메리칸 트래디셔널의 새로운 공급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원류로서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2000년대 후반, 옷을 못 입기로 유명한 미국인들에게 남성 패션에 대한 열풍이 부는데, 이때 이들이 자신들의 스타일을 원류를 찾아 헤맨 끝에 발견한 참조자료는 미국패션을 분석한 60-70년대 일본 잡지와 서적뿐이었습니다. 하여, 일본은 아메리칸 스타일의 구원자가 됩니다.
일본이 수입한 서구문화에 동양적인 모티프를 넣어 더 진짜처럼 보이게 한 것은 패션뿐만이 아닙니다. 저자인 데이비드 막스는 패션에서 이것을 찾을 수 있었지만 같은 모습이 일본의 건축에서도 발견됩니다. 일본인들의 패션 스타일에 대한 집착과 연구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건축에서의 리버스 엔지니어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좋든 싫든 한국은 일본이 걸었던 길을 따라갑니다. 아시아에 있어서의 근대화, 현대화의 과정이 거의 비슷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본을 바라보면 우리가 앞으로 당면할 과제가 예상 가능합니다. 지난달 25일 한국은행은 우리나라가 장기 저성장 구조에 접어들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정확하게 30년 전 일본도 같은 과정을 겪었습니다. 당시 사회상도 비슷합니다. 저는 그들이 행했던 시행착오를 우리가 반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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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푼을 휘려고 하지 마세요. 그것은 불가능하거든요. 대신 진실만을 생각하세요. 스푼이 없다는 진실. 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The matrix (1999) 중에서
사람은 누구나 주변의 모든 것을 좋은 것과 나쁜 것, 성공과 실패 등 가치를 부여해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판단의 근거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그것은 사건의 실체와 무관합니다. 판단 주체가 스스로 내리는 평가일 뿐입니다. 세상은 물리적 법칙에 돌아갈 뿐,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사슴이 사자에게 잡아먹히거나 원자핵이 붕괴되거나 하는 현상에 윤리나 도덕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가치판단 또는 믿음은 나 또는 내가 속한 집단의 통념에 속합니다. 즉, 스푼은 휘어지지 않습니다. 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판단과 믿음이 의미가 없다면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매트릭스의 감독 워쇼스키 형제는 그것이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스푼의 에피소드에 이어지는 네오와 예언자 오라클의 대화에서 오라클은 네오에게 그가 예언 속의 구원자인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네오가 스스로를 '그'가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네오는 위기의 상황 속에서 '그'의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었고 '그'로서 행동함으로써 결국 '그'로 완성됩니다. 네오가 예언 속의 '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행동만이 가치가 있었습니다.
저는 "스푼이 없다는 진실"을 이렇게 이해하려고 합니다.
"당신이 지금껏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모든 것을 의심하세요. 심지어는 당신이 아는 당신 마저도. 대신 바뀔 수 없는 진실이 무엇인지 생각하세요. 그리고 행동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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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르 코르뷔지에는 1950년대 중반 프로방스의 수도원 르 토로네Le Thoronet의 공간에 크게 감동하여 사진가 루시앙 헤르베Lucien Herve로 하여금 사진으로 담아 책으로 발간하도록 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이 책의 서문에서 “창조적인 건축의 원칙”을 이 건물 곳곳의 디테일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이 사진들은 “진실을 목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몇 년 후 근대건축의 걸작이자 르 토로네의 닮은꼴인 라 투레트 수도원Sainte Marie de La Tourette을 발표합니다.
진실은 시간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여기서 다시 확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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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지배 이념으로서의 유교의 바탕 위에 지어진 사당 건축 종묘. 태조 4년, 1395년에 그 원형이 축조되고 조금씩 중건되어 현재에 이른 종묘의 모습을 사진가 배병우 선생님이 1998년 모노크롬의 화면으로 담아냈습니다. 이 책에서는 종묘의 독특한 분위기, 왕조의 존엄을 나타내는 근엄함과 제례 공간으로서의 정갈함이 시공을 초월하여 전달되고 있습니다.
10여 년 전 인사동 헌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한 날,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아 책을 보이지 않는 구석에 꽂아놓았다가 다음날 가서 들고 온 기억이 뚜렷합니다. 답사에서 느끼지 못했던 것을 거장 사진가의 시선을 통해서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게 해 준 고마운 책. 요새 무엇인가를 잊어가고 있는 듯해서 다시 꺼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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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의 별궁인 가츠라 리큐桂離宮 사진집이 오늘 도착했습니다. 일본 건축에 관련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국에서는 구할 수가 없었고, 이 책은 지구를 1/3 바퀴 돌아서 제 손에 놓였습니다.
일본의 고건축 사진을 보고 있는데 뜬금없이 독일의 건축가 미스 반데 로에 Ludwig Mies van der Rohe가 생각났습니다. 'less is more'라는 철학적 언사로 유명한 미스는 신인시절 독일의 철학자 알로이스 릴의 주택을 설계하면서 니체의 사상을 배우게 되었고 이분법적인 세계를 부정한 니체의 생각이 그의 평생의 작업에 녹아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반면, 미스의 건축 언어가 동양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노자사상의 영향도 있었겠으나 아시아의 조형감각 - 세장한 기둥으로 이루어진 공간의 켜, 군더더기 없는 단순함, 수평성과 거대한 지붕의 강조 등 - 과 같은 시각적 측면에서의 영향이 지대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학교와 실무에서 많은 것들을 배웁니다. 비례와 같이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기술, 개념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포함합니다. 이 둘은 하나로서 미의 밑바탕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깔려있습니다. 실체는 허虛에 의해 지탱됩니다. 따라서 이 둘의 중요도의 무게는 비등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창작의 세계에서 최종 목표는 역시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이지적인 앎보다는 (설명할 수 없는) 쾌의 감각에 무의식적으로 끌리기 때문입니다. 가츠라 리큐의 사진을 보니 참 아릅답습니다. 이해가 없음에도 그렇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전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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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목조건축학회, 캐나다우드에서 설립한 우드 유니버시티에서 목조건축 설계-시공-감리 전문가 과정Wood Building inspection Course을 마쳤습니다. 2021년 10월부터 약 5개월간 목조건축에 대한 전문지식을 습득했으며 오늘 수료증을 받았습니다. 10년 전 목조벽을 적용한 종교건축, 3년 전 목조 주택을 힘겹게 설계했던 기억이 겹쳐집니다. 금번 교육을 당시에 받았었다면 더 빠르고 용이하게 프로젝트를 완료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알찬 교육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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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봤던 영화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아귀레, 신의 분노 Aguirre, Der Zorn Gottes(1972)
16세기, 황금의 땅 엘도라도를 정복하기 위해 떠난 스페인 원정대. 밀림과 습지를 만나 길이 막히자 선발대 40명을 보냅니다. 이들은 우르수아 사령관, 부사령관 아귀레, 군인, 황금을 탐내는 사람들 그리고 신의 뜻을 전하고자 하는 신부들입니다. 출발한 지 오래지 않아 유령처럼 출몰하는 원주민들의 습격과 끔찍한 밀림의 환경으로 많은 대원들이 헛된 죽음을 맞아하자 사령관 우르수아는 퇴각을 결심합니다. 하지만 정복욕에 가득 찬 아귀레는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사령관이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뜻에 반하는 사람을 희생시켜가며 무리한 탐험을 강행합니다. 결국 그는 원주민들의 습격에 모든 대원을 잃고 혼자 남습니다. 그리고 광기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신의 분노라고 외칩니다.
뉴 저먼 시네마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 작품은 현대 예술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어떤 장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영화 제작 당시 참신했던 영상기법들이 현대의 영화 기법에 흡수되어 90년대의 시각에서는 클리셰처럼 느껴졌던 것이 아닌지, 그래서 대부분의 장면이 잊힌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대사 하나는 머릿속에 또렷이 각인되었습니다. 반란군에 의해 처형될 운명에 처한 사령관 우루수아의 아내를 위로하는 신부의 말입니다.
"사람은 풀과 같아서 들판의 꽃처럼 피고 바람이 불면 지며 아무도 그 자리를 기억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꽃처럼 피어나다", 저는 이 말을 일생에서 단 한번 피어나는 젊음을 뜻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개인이 가진 불완전한 부분이 보완되고 잠재력이 제련되어 개화開花하는, 일종의 삶의 소명에 도달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서구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인'이 발명된 그들의 사회에서 자신의 의지를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그 결과를 좋든 싫든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서구의 '개인'이라 할 지라도 주변으로부터 유리되어 완벽한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는 스스로가 속한 집단에 좀 더 기대어 있고, 집단은 그만큼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구속합니다. 이 땅에서 근대화가 시작된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세계화의 시대에 우리의 습속이 서구, 그들의 것과 얼마나 다를까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만 삶의 틀, 생각의 뼈대는 쉽게 변치 않는 법입니다.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언제 꽃 피었을까. 아니, 꽃 핀 적이 있었던가. 아니라면 언제 꽃 피게 될 것인가.
*이 대사가 시편의 한 구절이라는 사실을 금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영화나 소설 같은 문화 매체를 접하다 보면 귀한 말들을 만나게 됩니다. 되뇌이게 되는 말들. 입속의 보석과 같은 말들. 이 문장도 그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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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영국의 록 밴드 '무디 블루스Moody Blues'의 음악을 즐겨들었습니다. 이들은 영국의 아트록 밴드 중 하나로서 1963년 결성하여 진보적인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70년대는 록의 전성기로 록의 형식이 정초 되었으며 클래식, 재즈와 같은 타 장르의 음악뿐 아니라 문학, 철학처럼 들리지 않는 것들 마저도 록과 접목시키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실험적인 음악을 아트록이라 부릅니다. 이 음악을 들어보면 그 소재의 다양함과 표현의 깊이에 놀라게 됩니다.
무디 블루스는 1968년 앨범 '잃어버린 화음을 찾아서In Search of the Lost Chord'에서 인도철학과 록의 교배를 시도합니다. 이 앨범의 마지막 곡 이름은 '옴Om'-인도철학에서 말하는 태초의 소리-으로 앨범의 제목과 연결시켜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가 찾고 헤매고 있는 것은 태초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도철학에 바탕를 둔 본 앨범에는 명상을 주제로 한 곡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여행방법The best way to travel' 이 그것입니다. 연주를 들어보면 후렴구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은 여행 방법이야 Thinking is the best way to travel'.
맞습니다. 상상만으로도 어느 곳에도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에 도달하는 곳은 내면입니다. 내면에는 길이 없습니다. 세상을 위한 여행지도는 있으나 마음 여행을 위한 지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도가 있다면 경로와 지름길,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마주칠지 알 수 있으나 마음속 여행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저녁입니다. 하루를 되새겨봅니다. 집에서 회사, 회사에서 다시 집으로-오늘의 여로는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주, 지난달, 지난해와 비교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넓게 보면 우리는 거의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습니다. 반면 시간은 흘러갑니다. 같은 시간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상황은 시시각각 변화하며 마음은 그것에 반응합니다. 우리는 매일 같은 자리에서 마음의 여행을 떠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쯤 또 다른 아트록 앨범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국의 밴드 '카멜Camel'을 대표하는 1984년도 앨범입니다.
타이틀은 'Stationary Traveller', '움직이지 않는 여행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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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에는 건축명장 피터 줌터Peter Zumthor가 있습니다. 스위스 발즈 Vals의 온천장은 그의 시적詩的 건축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는 세심하게 조각된 미니멀한 공예품 같은 건축물을 디자인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줌터의 세 번째 아틀리에 완성 당시 스텝 중 하나었던 스기야마 코이치로杉山幸一郎의 글에서 흥미로운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건축의 두 가지 난제인 '일상성'과 '전통성'에 대한 줌터의 입장이 잘 정리되어 있었는데 앞에서 설명한 줌터의 디자인 성향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스기야마 코이치로는 이 글에서 아틀리에가 준공된 2016년 2월 부터 본 작품이 건축잡지에 게재되는 2017년 4월까지의 에피소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촬영은 건물을 사용한 지 11개월이 경과된 시점에 이루어졌으며 사진에는 별도의 청소나 물건정리 없이 평소 그대로의 일하는 모습이 별다른 보정 없이 담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글에 삽입한 사진에서의 아틀리에 내부 풍경은 마치 정교하게 기획된 듯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줌터 건축의 특징이 잘 읽히고 있습니다.
스기야마 코이치로는 추측합니다. 특별한 포즈를 취한 사람들, 정리되지 않은 물품과 같은 현실세계의 소음이 그대로 드러난 건축사진임에도 건축이 돋보이고 있는 것은 줌터가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사용성(Gebrauch)을 목표로 한 건축이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실제 대부분의 출판용 건축사진은 일상의 흔적을 소거하는 경우가 흔한데 이는 일상이 건축이 표현고자 하는 부분을 가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답사를 하다 보면 사용자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을 때 더욱 돋보이는 건축이 있습니다. 이것이 줌터가 말하는 사용성이 반영된 건축이 아닐까 합니다.
다음은 전통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줌터는 콘크리트 구조체에 목조 커튼월을, 지붕에는 값싼 양철지붕을 사용해서 부지에 원래 있었던 헛간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 건물에 대랑의 유리가 쓰인 것은 프랑스 동부 주라Jura 지역과 와 스위스 바젤basel 지역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작은 시계 공방들의 외벽이 유리로 되어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디자인 의도를 설명하기 위해 스기야마 코이치로는 피터 줌터의 말을 인용합니다.
"나는 전통적인 형태를 참조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것 속에 있는 감정이나 느낌과 같은 것을 참조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만들어진 것이 현대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나라(지역)의 사람들이 이것이 자신의 나라(지역)의 건축이라고 생각하게 하고 싶습니다"
오랜 역사적 바탕 위에 급격한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한국에서 일상성과 전통성의 표현은 건축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여기에 대한 줌터의 입장은 어떻게 보면 보편적이자 추상적인 것으로 구체적인 해결책이 아니기 때문에 특별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것이며 그곳에 도달하는 것은 건축가 각자의 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줌터가 그의 생각을 멋진 작품으로 구체화했듯이, 한국적 맥락에서 이 두 가지 관점의 탁월한 해석이 반영된 수작이 발표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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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취미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음악을 듣는것이라 답합니다. 제게 음악은 위안이라고 할 것 까지는 아니나 숨쉴 공간을 만들어준다고 할까, 마음속 앙금을 녹여 내리고 자양분을 공급하는 그런 역할을 합니다. 팝에서 시작해 아트록이란 조금은 복잡하면서도 실험적인 70-80년대 음악을 거쳐 재즈에 도달했습니다만 지금은 좀 더 듣기 편한 음악을 선호합니다. 기량과 테크닉이 완벽한 유명 뮤지션의 음악보다는 뉴비 음악가들의, 그것도 조금은 생소한 장르의 음악을 많이 듣는데 그 이유는 간혹 초절정 테크니션의 음악은 너무나 완벽한 나머지 실수마저도 사전에 치밀하게 의도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반면, 아마추어 뮤지션들의 음악에는 약간의 느슨함, 아까 말했던 숨쉴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요새 듣는 음악장르 중 하나는 '퓨처 펑크'입니다. 무심코 떠난 여행에서 발견하는 멋진 볼거리처럼 이 장르도 의도치 않은 음악여정을 통해 도달했습니다. 이 음악은 주로 80년대 펑크를 샘플링하여 현대적인 리듬과 이펙트를 더하여 만든 음악입니다. 세계적인 유행이기는 하나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곡들이 유명세를 타는 듯 합니다.
느낌은 벽장에 있던 아버지의 깃 넓은 와이셔츠를 꺼내 화려한 티셔츠 위에 루즈 핏으로 입은 듯한 모습이랄까요. 그런데 추억과 현대의 조합이 조금 어설프게 느껴지면서도 묘한 맛이 있습니다. 레트로, 요새 디자인 유행과 궤를 같이하는 것 같네요. 하지만 이것이 과거의 부활은 아닙니다. 르네상스가 고전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고전의 재현이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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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건축공간에서 개인간의 접촉의 중요성을 적어봅니다. 사람은 스토리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보는 영화, 드라마, 심지어는 광고까지 스토리가 담겨있습니다. 요새는 더욱 더 스토리에 메말라있는듯 합니다.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타인과의 접촉이 점차 이해관계 중심으로 바뀌어가면서 스토리가 생성될 수 없는 그런 환경으로 바뀌어가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현대 건축에서는 타인과의 접촉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적절한 프라이버시의 유지도 중요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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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력 없는 과거의 자신을 둘러업고 그 굳어버린 차가운 손에 쥐어진 펜으로 그려내는 디자인은 생명력을 지닐 수 없습니다. 삶과 디자인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다시 보았던 영화 콜럼버스의 진부하기 짝이 없는 미장센 때문인지 어제까지의 자신의 죽음을 상징하는, 목을 맨 자신을 그려 넣은 타다노리 요코오의 선언적인 포스터가 오늘 유난히도 보고 싶었습니다. 1965년 타다노리 요코오가 마주했던 거대한 변화를 50여 년이 흐른 지금 저 또한 마주치고 있음을 느낍니다.
스스로 깨면 닭, 남이 깨면 달걀 프라이가 된다는 농담이 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스스로 깨어날 기회는 영영 갖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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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람시에 따르면, 새로운 생산체계와 그것을 따르지 못하는 사회가 마주치는 접점에서 병리적 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80, 90년대에서 보기 힘들었던 사회적 문제들이 요새 들어 자주 나타나는 것은 아마도 그것 때문이 아닐까요. 사회적 문제뿐 아니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변화만 보더라도 이 사회는 분명 또 다른 지향점을 향해 움직이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과거 인식의 지평에서 작동하는 사회는 이미 석양 아래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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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터슨 시의 23번 패터슨 노선의 버스기사 패터슨. 같은 길을 끊임없이 오가는 버스노선과 어제와 같은 오늘이 반복되는 패터슨의 삶은 무척 닮아있습니다. 실연으로 빚어진 자살소동은 장난감 권총으로 빚어진 촌극으로 마무리되고, 끔찍한 비극으로 종결될 것 같았던 버스 고장은 단순한 전기계통의 문제로 밝혀집니다. 반면, 소소한 불행으로 생각되는 삶의 문제는 끝내 정리되지 않으며,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등장인물들의 앞에 나타날 뿐입니다. 그들의 삶에는 특별히 나쁜 일도, 삶의 궤도를 바꿔버릴 엄청나게 기쁜 사건도 없습니다. 어제와 같은 일상에 무엇인가 조금 더해지거나 덜해질 뿐입니다. 그의 할아버지가 들려준 옛 노래에서 반복되는 하나의 소절만이 그에게 기억되며, 그것만이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그 스스로 말하듯, 삶에서 중요한 것은 어제와 오늘의 삶을 겹쳤을 때 보이는 차이점이 아니라, 무한 반복되는 일상인지 모릅니다. 다만 여기에 반드시 더해져야 할 것은 내가 타인의 삶을 내러티브의 소재로 삼듯 나 또한 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과, 이를 통해 '아하'라는 일상의 감탄사를 뱉게 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이것을 적어갈 삶의 빈 페이지들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닐까요.
Jim Jarmusch, Paterson,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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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같은 장소를 맴돌지만 여행을 떠나고 있습니다. 나는 시간의 여행자이기 때문입니다.
여정의 목표와 세부 계획을 짜듯, 종착지와 하루의 이동량을 정하고 일정대로 움직입니다. 출발 날짜와 경로가 변경될 수는 있지만 종국에는 목표했던 곳에 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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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는 건축은 풍부한 건축입니다. 중첩된 의미를 담 든, 시간에 의해 의미가 축적되든, 정성이 겹겹이 담기든.
삶도 동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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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과학채널 제작자인 데릭 뮐러는 2015년 조금 특별한 에피소드를 내보냈습니다.
사람들은 돌 그리고 다이아몬드가 닳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영원할 것이라고 믿듯이, 자신의 영혼과 의식도 무한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데릭은 우주가 하나의 작은 점에서 시작한 것처럼, 한 개인의 죽음은 우주 생성의 역진과 같이 하나의 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당신의 삶에서 과연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이 있겠냐고 묻습니다. 실패의 두려움, 부끄러움 그리고 용기의 부족으로 시도하지 못한 것들, 이 모든것은 의식과 함께 소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데릭은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매듭짓습니다.
"Your days are numbered and time is running out." "당신의 시간은 정해져 있고 그것은 닳아 없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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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삿짐을 정리하다 보면 꼭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향초입니다. 향초, 집들이나 생일 선물로 많이 주고받습니다.
향초는 아름다운 불꽃과 향기로 사랑받지만 머지않아 서랍 구석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샌가 선명한 색상과 광택을 잃고 잡동사니와 뒤섞여 버릴까 말까 고민하는 애물단지가 되곤 하죠.
초는 타들어가야 아름답습니다. 잊히고 먼지가 끼어 버려지는 것보다 낫습니다.
모든 사물도 그러합니다.